고아의 추억
- 어렴풋한 시절
해삼위(해삼위; 블라디보스토크)의 해변 조선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 살던 어느 한적한 농촌이었다. 해삼위에 가서 반년 동안이나 치료하시던 아버지가 조그만 목선을 타고 돌아오셨다. 뻔쩍뻔쩍하는 양복을 입으셨으나 선부(선부)에게 업혀 상륙하시던 아버지, 단장을 의지하고 혼자 서시자
"이리 온 태준아."
하고 부르시었다. 나는 낯선 손님만 같아서 어머니의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리며 돌아섰다.
"자식이 밸을 안 주는 걸 보니 정말 죽으려나 보다!"
하시고 아버지는 다시 선부에게 업히시었다.
나는 그때 여섯 살, 그 뒤로 며칠 만인지 몇 달 만인지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본 생각은 나지 않고 어머님이 목쉰 음성으로 여러 인부들을 지휘하시며 아버지의 산소를 묻던 광경만 어렴풋이 기억된다. 그때는 가을인 듯 역시 철나지 않은 누님은 나를 데리고 개암을 따먹으려고 없어지곤 하여 어머니는 이따금 우리를 찾으시기에도 바쁘시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유골이나마 이역에 묻고서는 편안히 누워보신 저녁이 없으신 듯 석 달이 못 되어 어머니는 미처 풀도 푸르지 못한 아버지의 산소를 헐으셨다. 흙이 좀 묻었을 뿐인 관을 조그만 청어 배에 싣고 고향 땅에 들어서 첫 항구를 찾은 것이 배기미, 지금 함경북도 부령 땅인 이진(이진)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관을 모새땅이나마 내 고향이라고 이곳에 다시 묻으시었다. 그리고 가끔 내 손목을 이끌고 가시어 내가 못 보는 체하면 돌아서 눈물을 씻으시곤 하였다. 해변이라 파도 소리가 어느 때나 쉬지 않았다. 내 귀가 파도 소리를 슬픈 소리로 기억한 것은 이때에 듣던 파도 소리였다.
한번은 어머니는 나만을 아니라 몇 사람의 일꾼을 데리고 아버지 산소로 가시더니 또 봉분을 하시었다. 그때는 관널이 썩어 있었다. 일꾼들도 얼굴을 돌이키나 어머니는 팔을 걷으시고 손수 뼈를 추리시어 물에 그기까지 하시더니 백지에 싸고싸고 묶고묶고 하여 그때까지 따라다니던 가복(가복) '정관이'에게 지워 철원 선영으로 보내시었다.
그때의 이진서 철원은 아득한 길이었다. 청진까지 나오면 거기서 원산까지는 화륜선(화륜선)이 있었으나 물길이 미덥지 못하여 육로로만 나가게 하신지라 떠난 지 석 달 뒤에야 선영에 봉안되었다는 기별이 났었다. 그러나 한 짐을 벗으신 듯한 어머니 이번엔 벗을 수 없는 병을 지고 누우시었다.
북국의 겨울 함박눈이 쏟아지던 밤이었다. 여러 날 만에 이상하게도 소강(소강)을 얻으시어 이날 저녁때에는 밥을 다 반합이나 잡수시었다. 우둔한 자식들은 병을 놓으시는 줄만 알고 좋아라 하고 밖에 나와 눈장난에만 팔리고 말았다. 문병을 왔던 할머니들의 급히 부르는 소리에야 뛰어 들어가보니 어허! 어머니는 그린 듯이 누워 계신데 만져보는 데마다 얼음 같으시었다.
제일 크다는 자식 누이가 열두 살, 내가 아홉 살, 누이동생이 세 살, 이것들이 앞에 있었기로 무엇 했으리오. 감지 못하시는 눈에 더욱 감시만 되었을 것이로되 차츰 철나며 생각하니 한 됨이 큰 것이다.
그 뒤 24년 꿈이라도 여러 해 전인 것처럼 어렴풋하다. 어머니의 무덤은 아직도 그 파도 소리 슬픈 웅기만 바닷가에 놓여 있다.
'그 무덤은 정말 나의 어머니일까?'
이런 의심을 생각하리만치 전설처럼 아득해졌다.
어려서는 부모님이 그립다기보다 아쉽곤 하였다. 옷이 더러워졌을 때 무엇이 먹고 싶을 때 그리고 무슨 영일(영일)이 돌아올 때는 더욱 못 견디게 아쉬웠다. 사탕처럼 비단옷처럼 따뜻한 아랫목처럼 아쉬운 부모님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피부에서보다 마음으로 그리워지는 부모님이시다. 배고프지 않고 등 춥지 않되 오히려 즐거운 때일수록 문득문득 생각나는 이들이 그들이시다. 어떤 때는 고요한 밤 지는 녘에 종교와 같이 가만히 그리워지는 분들이 그들이시다.
해마다 벼르기는 하지만 올 여름에는 꼭 어머지 산소에 다녀오리라.
- 이태준, [조광] 1936년 1월.